『단단한 공부』 강유원 –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동아시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정확하게 쓸 수 없거나 내용을 뚜렷하게 알지는 못해도 공자와 그의 제자 또는 여러 사람의 대화를 묶어놓은 『논어』論語의 첫머리 구절을 어렴풋하게라도 기억한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우리의 삶의 목적은 ‘기쁨’에 있다. 이 기쁨은 몸과 마음 모두에서 느껴야 제대로 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우선은 배운다.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해본다. 이처럼 뭔가를 배우고 그렇게 배운 것을 몸으로 실습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배움은 ‘무엇’이라는 대상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를 아는 사람은 배울 필요가 없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배움의 길에 들어설 수가 있다.

그런데 자신이 뭔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실 아무것도 모르면, 즉 절대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르므로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배움의 역설’이기는 하지만 일단 자신이 뭔가를 모르고 있음을 안다면, 즉 ‘무지의 지’의 단계에 들어섰다면 곧바로 배움이 시작된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이 곤혹스럽게 느껴질 사람도 있겠으나 우리는 그렇게 배우기 시작하는 일을 기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기쁘지 않다면, 그저 의무감에 의해서 뭔가를 배우고 익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잘 살 수 없다.

우리가 뭔가를 배운다고 할 때, 그 무엇은 좋은 것이어야 한다. 좋은 것은 쓸모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좋은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쓸모 있는 것을 배울 경우 그 쓸모가 떨어지면 다른 쓸모 있는 것을 찾아 더 배워야 하고, 도덕적으로 좋은 것은 잠시라도 그치면 악한 길로 빠져버리니 이것 역시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끝이 없는 것이다.

배움에 막 들어선 사람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잘 배울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을 알려면 선생이 있어야만 한다. 아니, 선생이 없다면 처음부터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선생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생과의 전인격적인 부딪힘이 있은 다음에야 그에게서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배움은 선생과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는 선생이 가르쳐줄 수 있다. 읽기는 선생이 가리키는 것을 따라 읽는 것에서 시작된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선생이 가르쳐줄 수 있다. 쓰기는 선생이 가리키는 것을 베껴 적는 것에서 시작된다. 선생은 최소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배움은 학교에서 시작되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배우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배움은 삶 속에서 지속되고 또 그래야만 한다. 선생에게 배우는 것은 원리일 뿐이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 배우고 익힌다. 그렇게 잘살 때 우리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배우고 익히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힘든 일에서만 기쁨이 생겨난다. 그러니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끊임없이 배우고 틈날 때마다 익혀야 한다.

 

강유원(철학박사), 『인문고전강의』 저자

No comments